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립 콘서트허바우 관현악단 (문단 편집) == 연혁 == 악단 이름에 들어 있는 '콘서트헤보(Concertgebouw)[* '(Concert-연주회 + gebouw-건물/네덜란드어)'. 즉, '음악당' 이라는 뜻이다.]' 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연주회 전문 공연장의 명칭이기도 한데, 1888년 4월에 개관했다. 여기 상주하게 되는 이 악단은 몇 달 뒤에 창단되었고, 공연장 이름을 따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라고 명명되었다. 첫 공연은 그 해 11월에 빌럼 케스의 지휘로 개최되었고, 케스는 동시에 초대 상임 지휘자로도 취임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연주회 감상 매너는 그야말로 [[막장]]이어서, 대중 콘서트가 아니라 정기 연주회에서조차 음식이나 음료수를 싸들고와 먹고 시끄럽게 잡담을 나누는 청중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케스는 많은 논란과 반발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의 이러한 비매너 행위를 엄격히 금지시켰고, 악단에도 엄정한 태도를 취하면서 양자의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했다. 케스가 1895년에 스코틀랜드 관현악단(현 로열 스코티시 내셔널 오케스트라)으로 이임한 뒤에는 미래에 거장이 된 빌렘 멩겔베르크라는 지휘자가 뒤를 이었는데, 부임 당시 겨우 스물네 살이라는 젖[[뉴비]]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악단 측으로도 이런 별 경험없어 보이는 [[듣보잡]]이 등장한 것에 별로 탐탁치 않은 것 같았지만, 멩겔베르크는 전임자 못지 않게 단원들을 갈궈대면서 분위기를 다잡아갔다. 애송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멩겔베르크는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보여 주어 [[그리그]]에게 격찬을 받았고,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도 활발히 교류하면서 오케스트라의 위상을 단번에 급상승시켰다. 단원들과 궁합이 어찌되었든 멩겔베르크는 취임한 이래로 무려 '''50년''' 동안이나 상임 지휘자 자리를 지켰다.[* 메이저 악단에서 이 정도로 오래 대빵질을 한 지휘자는 정말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기껏해야 레닌그라드 필의 상임이었던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정도가 경쟁자로 눈에 띌 뿐이었다.] 멩겔베르크는 기존 레퍼토리 외에도 생전에 친교가 있었던 [[구스타프 말러]]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들을 발빠르게 네덜란드에 소개했고, 음반 녹음도 적극적으로 진행해 악단과 HMV(현 [[EMI]])와 텔레풍켄(현 텔덱)에 상당량의 레코드를 취입하기도 했다. 자신 외에도 부수석 급의 직책인 '제1지휘자' 와 부지휘자 급인 '제2지휘자' 라는 직책을 만들어 동료나 후배 지휘자들이 무대에 설 수 있도록 주선해 주기도 했다. 악단은 [[제1차 세계대전|1차대전]] 때도 해단되는 일 없이 계속 활동할 수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2차대전]]이 터지자 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독일군]]에 점령된 네덜란드는 [[나치]] 총독의 엄한 통제를 받게 되었고, 악단도 이런저런 친나치 집회의 들러리나 독일군 위문 연주회 등 관제 행사의 참여를 강요받았다. 이 상황 속에서 멩겔베르크는 나치에 협조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멩겔베르크의 부모가 독일에서 건너온 이민자였던 것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멩겔베르크의 본명도 독일식인 빌헬름이다. 다만 일종에 예명으로 네덜란드식인 빌렘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멩겔베르크는 그냥 협조하는 수준에서 몇 발짝 나가서 친나치 발언을 공공연히 하는 등의 네덜란드의 반나치 [[레지스탕스]]들의 [[어그로]]를 잔뜩 끌어버렸다. 종전 후 몇몇 애호가들의 쉴드에도 불구하고 멩겔베르크는 네덜란드 법정에서 나치 부역자로 단죄되었고, 그 동안 네덜란드에서 받아왔던 모든 명예와 혜택을 박탈당하고 지휘 활동을 영구적으로 금지당했다. 독일 등에서 연주 금지당했던 지휘자들이 1947년 순차적으로 복귀하자 네덜란드 법정도 종신 지휘금지 조치를 6년으로 단축했다. 그러나 멩겔베르크는 [[스위스]]에서 은둔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멩겔베르크의 후임은 대전 중 제2지휘자로 재직했던 에두아르드 판 베이눔이 맡았는데, 베이눔은 지병인 [[심장병]] 때문에 제약을 받았으나 전후 어려운 시기에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전후 네덜란드에 설립된 필립스 레코드를 통해 녹음 활동을 재개했다. 전임자에 비해 유려함은 덜했지만 좀 더 명쾌하고 현대적인 면모의 연주를 끌어내면서 악단의 체질을 개선시키기도 했다. 베이눔이 1959년 4월에 악단과 리허설을 하던 중 심장 발작으로 급서하자, 네덜란드 내에서 촉망받던 젊은 지휘자 [[베르나르드 하이팅크]]가 제1지휘자 역할로 공백기의 활동을 대신했다. 오케스트라는 하이팅크를 장기적인 차기상임지휘자로 여겼지만 너무 젊고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전 중 제1지휘자로 초빙되었던 [[독일]]의 [[오이겐 요훔]]를 초청하여 하이팅크와 공동 상임지휘자 제도를 운영했다. 하이팅크와 요훔이 1961년에 공동 상임지휘자에 취임했고, 1963년에 요훔이 물러나고 하이팅크가 단독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하이팅크 역시 필립스를 중심으로 상당량의 녹음을 남겼다. 1980년대 초반에는 재정난에 빠진 네덜란드 정부가 악단 재정 감축과 함께 20여 명의 악단원들을 해고하겠다고 통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빡친 하이팅크가 대놓고 정부를 [[디스]]하면서 자신도 때려치겠다고 강하게 나왔고, 정부 측에서 [[버로우]] 타면서 하이팅크에 대한 악단의 신뢰도 크게 상승했다. 1988년에는 네덜란드의 군주인 베아트릭스 여왕으로부터 '왕립' 호칭을 받아 공식 명칭이 현재의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하이팅크는 왕립 칭호를 받은 그 해에 [[영국]] [[런던]]의 코벤트 가든 왕립 오페라단 음악 감독에 전념하기 위해 사임했고, 후임으로는 1985년부터 정기적으로 객원 출연 중이었던 [[이탈리아]] 출신의 [[리카르도 샤이]]가 창단 이래 최초의 외국인 지휘자로 부임했다. 샤이 역시 취임 전부터 단원들로부터 평판이 좋았고, 하이팅크가 다루었던 레퍼토리 대부분을 넘겨받으면서 현대음악을 적극적으로 공연하기 시작했다. 샤이는 2004년에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으로 이임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고, 후임으로는 [[라트비아]] 출신의 [[마리스 얀손스]]가 부임했다. 얀손스는 부임 당시 3년 계약을 맺었지만, 이후 계속 계약이 추가 갱신되어 2014년 현재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만 얀손스도 베이눔과 마찬가지로 심장이 그리 좋지 않아서 공연 취소크리가 종종 벌어지고 있다. 그 때문인지 마리스 얀손스는 2015년까지만 상임을 맡고 퇴임하기로 2014년 4월 결정했으며, 이에 악단은 얀손스의 뒤를 이을 상임지휘자로 이탈리아 출신의 다니엘레 가티를 선택했으나 2018년 가티의 여성 뮤지션 2명에 대한 성추행 혐의가 드러나 피소되면서 해임당했다. 현재 악단은 오케스트라 모차르트의 음악감독으로 부임한 가티 대신 제1객원 지휘자인 헝가리의 [[이반 피셔]]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